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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6. 여나   2007-01-28 03:40:57    
단군 이전에도 이미 5천년의 역사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것이 사실인가요?

좋은 싸이트를 운영하고 계심에 감사드리며......


    운영자       
우리 역사가 언제부터 시작했으며 그 역사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를 아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다고 봅니다.

우리의 이웃나라들은 한결같이 우리의 역사를 축소하여 생각하려 합니다.
일본의 식민사관이 그렇고 또한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이 그러합니다.

우리의 역사를 우리가 설명하는 일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가령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역사서가 지금까지는 정사로 알려졌는데
이 역사서들에 의하면 우리의 역사는 길지 않습니다. 고조선까지도 이 역사서에는
신화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한단고기나 규원사화등의 역사서는 우리민족의 입장에서 우리의 역사를 본다는 점에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와는 다릅니다.
그리고 한단고기의 경우 우리의 역사를 고조선은 물론이고 고조선이전의 배달국과 한국까지의 역사가 소상하게 나타나있습니다.
이 경우 우리의 역사는 일만년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한단고기와 규원사화가 정사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습니다만 재야에서는 폭넓게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 한단고기에 대해서는 일본의 사학자 오향청언이 '아세아의 지보 한단고기'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기존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와 비교하여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 삼국사기는 관찬사官撰史같고 ,삼국유사는 중 일연이 지은 것으로 불교 빛깔이 강하다. 그러나 한단고기는 ... 조선고대의 기록이요 ..... 거기엔 한겨레의 우주관과 신관이 들어 있어 ,그것은 철학책이요 종교책인 동시에 문화책으로서도 독자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다."

이 한단고기에 의하면 우리의 역사는 분명히 일만년입니다.

그럼 이 답변이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505. 송단재   2006-10-17 16:58:44    
홈페이지에 들어오면서 들어오는 단군 영정을 보고 이 글을 퍼 오게 되었습니다.


현존하는 단군 영정에 대하여    
  
  
    
‘동사유고’ 등의 옛 문헌을 보면 현존하는 단군의 영정은 신라말기에 ‘솔거’ 화백이 그린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당시는 민간백성들이 집집마다 단군을 모셨기에 솔거는 일천 매에 달하는 단군의 영정을 그린바 있었다. 그러나 불교국가인 고려와 유교국가인 이씨조선을 지나면서 솔거의 단군영정은 거의 소실되고 말았다.
1910년 경술년, 목을 조이고 들어오는 일제의 압박에 온 나라가 떨며 긴장하고 있을 때, 대종교(大倧敎)를 중광한 나철(羅喆, 1863~1916)에게 강원도 명주군 석병산에 살고 있다는 한 노인이 찾아와 누런 비단에 싼 솔거의 진본(유일본) 단군영정을 전하고 돌아갔다 한다.

일제의 엄청난 압력으로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닥쳐있음을 감지한 지백련(지석영의 형님) 화백은 솔거의 단군 진본을 모체로 하여 복사본을 그린 후 한일합방의 국치로 온 백성들이 통곡하던 8월 21일의 바로 전날 그가 그린 영정을 봉안하였다.

그 후,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나철 선생이 만주로 피신하면서 총본사를 옮겨가자 조선의 남도본사는 호석(湖石) 강우(姜虞) 선생에게 맡겨졌다. 강우 선생은 일제의 수색을 피하여 단군의 영정을 자신의 집으로 옮겨 다락 속에 깊이 감추어 두었다가 1932년 장남 소석(小石) 강진구(姜鎭求)에게 단군의 존영을 지키라는 유언을 남기고 작고하였다.
이렇게 천진(天眞)을 이어받은 강진구는 다시 그의 손자인 강현구에게 전하였고, 단군의 존영이 예사롭지 않은 것임을 깨달은 강현구가 부여박물관에 기탁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렇게 살아남은 단군의 영정은 1949년 제헌국회에서 국조 성상으로 공인되었다.
그런데 1977년 8월에 단군 숭봉(崇奉) 단체인 현정회(顯正會)가 또 하나의 전혀 다른 영정을 정부의 표준영정으로 승인받아 표준 영정이 두 개가 되었다. 그것은 1969년 초상화가 김종래씨가 그린 단군영정을 참고하여 신상근씨가 제작한 단군동상을 모델로 하여 다시 그림으로 그린 홍석창씨의 영정이었다.

정부가 승인한 이들 표준영정의 차이를 보면 현정회의 것에는 어깨의 마늘잎이 없고, 대종교의 영정에는 있는데 정부측은 현정회의 것은 경모의 대상이고 대종교의 것은 신앙의 대상이라는 웃지못할 괴변으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단군이 돌아가신지 이미 수천년이 지났고 또 단군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남아있을 수도 없으므로 누가 제작한 영정이 옳고 그르다고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현존하는 영정에 묘사된 단군의 모습은 신화(神話)속의 단군일 수는 있어도 그 어느 것도 역사속의 단군일 수는 없다.
본 저자가 생각하는 진정한 단군의 모습은, 적어도 역사의 여명기에 역동적인 기마군단을 이끌고 광활한 만주대륙을 정복하고 통일한 위대한 영웅의 모습이다.
단군은 불과 14세에 외조부의 나라에 부왕(副王)으로 취임한 후 곧장 군대를 이끌고 변방의 적들을 복속시키며 무려 19년간을 전쟁터에서 보냈다. 또 부왕(父王)의 나라이던 신시(神市) 배달한국[倍達桓國]을 인수받고 나서도 그의 대단군 취임에 반대하는 반적들의 내란을 진압하는데 무려 3년 이상의 시간과 힘을 쏟고 나서야 비로소 천하통일을 이루고 대쥬신제국[大朝鮮帝國]의 입국을 만방에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단군을 징기스칸(Genghis Khan)이나, 치우천황(蚩尤天皇)에 비교되는 대영웅의 모습으로 묘사할 수는 있어도 깊은 산골에 앉아 한가롭게 도(道)를 닦고 있는 신선(神仙)의 모습으로 그릴 수는 없다.




    운영자       
좋은 자료입니다.

하지만 단군을 징기스칸(Genghis Khan)이나, 치우천황(蚩尤天皇)에 비교되는 대영웅의 모습으로 묘사할 수 있겠지만

단군이 투구와 갑옷을 입고 큰 칼을 허리에 찬
전투복만 입었다고 보기는 어렵겠지요.

전투복 외에 문무백관을 거느린 예복을 입은 모습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영정과 같은 옷을 입은 모습이
불가능한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볼 수 있는 근거 또한 없겠지요.
이 모습 또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목적을 위한 옷일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쨋든 설득력이 있는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504. 허난형     2006-10-03 16:15:19    
안녕 손진우 ㅋㅋㅋㅋ 난 케로로야 난 널사랑했어 우리키스하자 우


 
  503. 정효주     2006-08-29 20:31:33    
안녕하세요. 학교숙제로 단군신화에 대한것을 써오라고 했는데 네이버에서 단군닷컴이 나와서 들어가보니까 많은 정보가 있더군요. 학교숙제에 도움이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그러면 다음에 필요할때 들릴께요


    운영자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필요할 떄면 언제든 들려주기 바랍니다.



>안녕하세요. 학교숙제로 단군신화에 대한것을 써오라고 했는데 네이버에서 단군닷컴이 나와서 들어가보니까 많은 정보가 있더군요. 학교숙제에 도움이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그러면 다음에 필요할때 들릴께요
 
  502. 여울   2006-08-11 12:08:32    
단군시대에 제사를 올리던 신단같은 유적이 지금도 남아있나요?

만약 있다면 이름과 있는 위치를 알고싶어요


    운영자       

단군시대에 제사를 올리던 신단과 같은 유적에 대한 질문이군요.

단군왕검께서 친히 제사를 올리시던 신단이 남한에 있습니다.

그 이름은 참성단이며

위치는 경기도 강화섬에 존재합니다.

원래는 강화섬과 떨어진 화도 또는 고가도라고 불리던 섬의
꼭대기에 존재하던 것인데

지금은 둑으로 막아 강화도와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501. 이경윤   2006-07-18 21:16:17    
제가 방학숙제로 인해서 물어복 것이 있습니다!
지금 저희들의 몸에는 단군의 피가 흐르고 있을까요?
알려주세요.


    운영자       
물론입니다.

우리 모두는 단군의 자손이며
우리들의 몸에는 단군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500. 김종욱   2006-05-04 20:48:42    
문화유산정보신문 헤리티지(the heritage times) 2006년 4월 27일(목) 제 9호 3면 보도연재물
韓民族의 底力
                                 김종욱: 더한힘연구소장(www.hanhim.org),
                               한국크리스토퍼리더십 대전충남북지회장
1.고구려 제일의 코드-다물(多勿)
  우리는 고구려하면 가슴이 뿌듯해진다. 사라진지 1,300여년이 흘렀건만 왜 우리는 고구려 앞에 “아! 고구려!”하며 감탄과 자부심을 느끼게 되는가?
그 이유는 두말 할 것 없이 고구려가 강성하였기 때문이다. 그럼 왜 강성하였는가?
고구려 강성의 제일 원인은 다물 정신이다.
고구려가 자랑스러운 이유는 첫째, 영토가 광대했기 때문이다. 세계 237개국 중에서 남한의 영토가 109위라는 작은 나라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영토가 넓은 것은 무조건 가슴 뿌듯하다. 고구려의 영토 범위에 대하여 학설이 분분하지만 넓었다는 공동인식은 일치하기에 구체적인 거론은 생략한다. 둘째 이유는 지나 대륙 국가들에 꿀리지 않았던 강력한 힘 즉 썬파워였었다는 것이다. 고구려가 삼국사기 연표에는 705년간  지속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그 사이에 지나 대륙에 세워졌다 명멸한 나라가  38개국이다. 그중에서 고구려 후기쯤 가장 강력했던 나라가 수나라와 당나라이다. 수나라는 진시황이 지나를 통일한 후 두 번째로 진시황보다 더 넓은 강역을  통일했다.  그 수나라가 통일 후 고구려가 존속하는 한 발 뻗고 자기 어려울 정도로 안심이 안 되어, 고구려마저 복속시키려 양제와 문제가 세습하여 침공하기에 이르렀었다. 지나 역사상 최대의 병력 규모인  정규군 1,138,000명에 후방 지원군까지 합하여 이름하여 20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그 군사가 출전신고 즉 출정식에 소요된 기간이 무려 40일이었고 늘어선 행군의 거리만도 960리에 달했다고 수서와 삼국사기는 전한다.
이러한 최대병력을 동원하여 침공하였건만 당시 추정으로 최대인구 300만 여명에 군사 30만 여명의 고구려가 이를 물리쳐 결국 수나라는 멸망하게 되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 후에  당나라와의 싸움은 어땠는가. 지나 5,000년사에 가장 유능했던 군주로 추앙받는 당 태종 이세민이 손수 진두지휘하여 고구려를 침공했건만,  안시성 전투에서 더 이상 진격을 못하고 패주하되 고구려 군사가 예측하기 어려운 험로와 늪지대로 퇴각하다가 수많은 인마사상자를 내고 천신만고 끝에 지나의 도성에 다다른 전사 또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 후 당 태종은 3년만에 죽으면서  “다시는 고구려에 출병하지 말라”유언하였으니 고구려의 군사력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은가? 기타 36개국의 허약했던 나라들은, 연나라 왕 풍홍이 위기시에 상서 양이를 고구려에 보내 지원을 청하였던 사실 등이 있으니 더 이상 언급을 생략하겠다. 이리하여 우리는 고구려하면 지금도 가슴이 뿌듯하다. 그러면 고구려가 이렇게 강성하게 된 근본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바로는 상무정신과 용맹성뿐이다. 그러니 이는 다물 정신을 실현하기위한 하부적인 개념일 뿐이다. 그러면 다물 정신이란 무엇일까? 우리의 정사 삼국사기 고구려 시조 왕 동명왕편에는  麗語,謂復舊土爲多勿이란 구절이 있다. 이는 “다물이란 고구려 말로써 구토를 회복함을 말한다“는 뜻이다. 요즘 말로는 물건을 샀다가 맘에 안 들어 “되 물리다”의 어원이다. 그래서 다물이란 조상의 옛 땅 즉 고조선을 회복 되찾겠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삼국사기에 있는 기록상 최초로 되찾은 송양의 비류국을  多勿都라이름하였다.(宋讓以國來降. 以其地爲多勿都)이는 조상의 땅을 되찾음으로써 국민들의 사기가 충천하게된 것을 오랫동안 유지 발전시키기 위함이었다. 이상은 사대사관을 벗어나지 못한 사대주의 유학자 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의 기록이고 우리 민족주체사 즉 제도권에서 무조건 위서라고 매도하는 한단고기에는 이 다물이 고구려의 국시이고 동명성제의 연호라고 되어있다. 또한 광개토대제가 병사들을 이끌고 전쟁터에서 진두지휘 하며 부른 군가로써 多勿興邦歌가 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고구려는 다물 정신을 국시로 조상의 땅 즉 고조선을 회복하기위하여 싸워 이겨서 이를 회복하여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을 알 수 있다.고로 고구려 하면 다물, 다물 하면 고구려 즉 고구려의 가장 중요한  코드는 다물이다. 문제는 이렇게 중차대한 의미의 용어를 왜 어째서 국사교과서에 안 가르치고 있나 이다. 아마도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다물이란 말이 삼국사기에 있다는 것 자체가 눈의 가시로 여겨졌을 것이고, 이를 답습한 식민사관, 반도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단정적으로 증명하는 것으로, 해방 61년이 되는 올해까지 다물을 가르치지 않음에 통분을 금할 수 없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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